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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선 무궁화호 열차가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허리를 뚫고 달려가다 멈춰 서는 경북 봉화군 춘양역은, 기차 여행자들에게 각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간이역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원래 계획된 철로를 우회시켜 춘양면으로 철길을 끌어왔다는 일화에서 '억지춘양'이라는 유명한 속어가 탄생했을 만큼, 이곳은 과거 백두대간 일대의 목재와 물류가 집결하던 번성한 산간 거점이었습니다.
끝자리 4일과 9일에 열리는 춘양 5일장은 춘양역 앞 광장에서 구도심 중심 골목을 따라 형성됩니다. 지금은 목재 산업의 쇠퇴와 함께 조용한 면 소재지로 내려앉았지만, 단단하고 붉은빛을 띠는 최고급 소나무 '춘양목(금강송)'의 본향답게 장터 곳곳에는 묵직한 산골의 기품과 토속적인 정취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춘양역 광장에서 이어지는 솔향 가득한 아침 장터 풍경
춘양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2분 남짓 걸어가면 면사무소 앞 도로를 중심으로 장터 천막들이 길게 늘어섭니다. 춘양 장터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후각을 자극하는 것은 깊은 숲에서 풍겨오는 듯한 쌉싸름한 풀뿌리와 흙내음입니다.
태백산과 각화산, 청량산으로 둘러싸인 봉화의 지형적 특성상 좌판의 주역은 해발 수백 미터 고지대에서 채취한 산야초와 임산물입니다. 어르신들이 손수 캐온 자연산 송이버섯과 표고버섯,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생더덕과 당귀가 망태기마다 그득합니다. 바구니마다 흙이 마르지 않은 곤드레나물, 어수리나물, 명이나물이 소담하게 놓여 있으며, 봉화의 명물인 단단한 사과와 찰수수, 기장 같은 청정 잡곡이 손님을 맞이합니다. 나물의 쓰임새와 말리는 법을 살갑게 일러주는 상인 어르신들의 말투 속에서 내륙 산골 장터의 순박한 인심을 고스란히 체감하게 됩니다.
가마솥에 고아낸 메밀 묵채밥과 장터 수수부꾸미 한 입
장터 중심 골목을 걷다 보면 은은한 들기름 냄새와 구수한 장국 냄새가 걸음을 멈추게 만듭니다. 춘양 장터에서 허기를 달래기에 가장 좋은 별미는 바로 갓 쑤어낸 메밀묵을 멸치장국에 말아내는 전통 묵채밥과 노릇하게 구워내는 수수부꾸미입니다.
거칠게 갈아낸 토종 메밀로 쑨 묵을 길쭉하게 채 썰어 대접에 담고, 따끈한 멸치 다시마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 냅니다. 여기에 묵은지와 김 가루, 참깨를 듬뿍 얹어 숟가락으로 훌훌 저어 넘기면, 혀끝에 감도는 쌉싸래한 메밀의 향과 담백한 국물이 어우러져 속을 편안하게 감싸 안습니다. 곁들여 먹는 수수부꾸미는 차진 수수 반죽 속에 달지 않게 으깬 팥소를 넉넉히 넣고 무쇠 팬에 들기름으로 지져내어,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고소한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집니다. 기름지지 않고 소박한 산골 장터만의 밥상은 뚜벅이 여행자의 고단함을 달래주기에 충분합니다.
만석골 고택 골목과 춘양목 금강송 숲길을 걷는 시간
국밥과 부꾸미로 속을 든든히 채운 뒤에는 춘양역 뒤편으로 이어지는 옛 골목과 금강송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춘양면 골목길에는 과거 부유한 목재상들이 살았던 한옥과 조선 시대 사대부 가옥인 만석골 고택들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어 차분한 고택 산책을 즐길 수 있습니다.
마을 외곽길을 따라 약 20분 정도 완만한 산길을 걸어 올라가면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춘양목 군락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일반 소나무와 달리 껍질이 붉고 나이테가 촘촘하여 궁궐의 대들보나 문화재 복원용으로 쓰이는 금강소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피톤치드 가득한 솔숲길을 걸으며 솔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장터의 떠들썩했던 활기와 울창한 산림의 고요함이 교차하며 걷기 여행의 여운을 한층 깊게 만듭니다.
춘양 뚜벅이 여행자가 알아두어야 할 실전 이동 팁
춘양역은 영동선 무궁화호와 백두대간 협곡열차(V-train)가 정차하는 역이지만, 일반 열차 운행 편수가 하루 몇 회 되지 않습니다. 영주나 안동, 혹은 태백 방면으로 나가는 상·하행 열차 시간표를 반드시 사전에 메모해 두어야 역 대합실에서 몇 시간씩 발이 묶이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봉화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춘양으로 들어오는 농어촌 버스가 40분~1시간 간격으로 운행됩니다.
또한 춘양 5일장은 전형적인 산간 면 소재지 장터라 정오가 지나면 거래가 대부분 마무리되고 오후 2시 무렵부터는 상인들이 철수합니다. 따라서 오전 10시 이전 장터에 도착하여 난전과 먹거리를 먼저 둘러본 뒤, 오후 햇살이 좋은 시간에 만석골 한옥 골목과 금강송 숲길을 둘러보는 순서로 동선을 짜는 것이 가장 여유롭습니다.
핵심 요약
- 춘양 5일장은 끝자리 4일과 9일에 서며, 영동선 춘양역 바로 앞에서 백두대간 청정 산야초와 제철 임산물을 풍성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 장터 먹거리로는 멸치 육수에 말아내는 따끈하고 담백한 메밀 묵채밥과 들기름에 지져낸 팥소 수수부꾸미를 추천합니다.
- 장터 일정 후 만석골 옛 고택 골목과 곧게 뻗은 춘양목(금강송) 숲길을 연계해 걸으며 근대 목재 유통 역사와 깊은 숲의 정취를 함께 즐길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전남 남단 고흥반도로 내려가, 소록대교를 마주한 바다 풍경과 남도 포구의 싱싱한 제철 어물이 기다리는 '전남 고흥 녹동 5일장 도보 기행'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곧게 뻗은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나 옛 철길 모퉁이를 걸을 때 어떤 풍경에서 가장 큰 편안함을 느끼시나요? 자유롭게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